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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이 된 저희 손주는 요즘 들어 부쩍 말이 늘어 하루하루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도 제법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어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의 생각을 똑부러지게 표현하곤 합니다.

 

단순히 들은 말을 기계적으로 따라 하는 수준을 넘어,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담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요즘 손주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그림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몇 번 읽어준 책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그림만 보고 그 내용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는 책에 나온 문장을 토대로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곤 합니다.

 

책 속 문장을 그대로 외워 말하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자기 방식대로 이어 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이런 귀여운 행동이 때로는 어른들의 오해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 문장이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지 배경을 모르는 어른이 들었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아이가 불쑥 나이에 맞지 않는 고급스러운 표현이나 낯선 문장을 말하면, 전후 사정을 모르는 어른은 "이 어린아이가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하지?" 하며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버릇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주변에서 그런 오해로 인해 당황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의 한 장면을 명확히 기억하고 자기 방식대로 재현해 본 것뿐인데, 이야기의 배경을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엉뚱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1. 책 문장을 기억해 이어 말하는 '모방 읽기'란?

30개월 손주와 함께 바닥에 그림책을 펼쳐놓고 모방읽기를 하며 책을 읽어주는 모습

 

아이가 글자를 몰라도 책을 보고 이야기를 읊조리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우수한 언어발달 과정입니다.

 

이는 글자를 직접 읽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반복해서 들려준 책의 문장과 리듬, 목소리의 억양까지 한데 기억하여 이야기를 이어 말하는 '모방 읽기(Emergent Reading / Imitative Reading)' 현상입니다.

 

미국 유아교육협회(NAEYC)에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책의 문장을 외워 따라 말하는 모습을 문해력(Literacy)이 시작되는 아주 중요한 초기 언어 발달 단계로 설명합니다.

 

또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30개월 발달 기준에 따르면, 두 단어 이상을 연결해 말하고 책 속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등의 의사소통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달 구분 30개월 아동의 주요 언어 및 행동 특징
모방 읽기 현상 그림을 보며 반복해서 들었던 문장, 억양, 운율을 기억해 스스로 읊조림
언어 표현력 2~3개 이상의 단어를 조합하여 의사를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전달함
의사소통 및 상호작용 어른의 말을 듣고 이해한 뒤 반응하며,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요청함
양육자의 역할 아이의 엉뚱한 말도 책 속 배경임을 이해하고, 억지로 정정하기보다 경청해 주기

물론 모든 30개월 아이가 똑같은 속도로 자라는 것은 아니며 아이마다 발달 차이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미 일상 대화가 자연스러운 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그림책의 문장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같은 책을 몇 번이고 계속 읽어달라는 손주의 요구가 가끔은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 반복적인 시간 속에서 문장의 구조와 이야기의 리듬을 익혀나가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니, 함께 책을 읽는 그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2. 어른의 오해가 아이에게 남기는 상처 (지나온 기억)

손주가 외워 말하는 책 속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오래전 제 아들의 어린 시절 일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저희 집은 사교육이나 학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거실 상 머리에 저와 아들이 마주 앉아 차근차근 문제집을 풀며 함께 공부하곤 했습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원리를 이해하며 공부를 아주 곧잘 해냈습니다.

 

어느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저는 아이의 예습과 복습을 위해 산수 문제집 두 권을 사주었습니다. 아이는 방학 동안 꼬박꼬박 문제집을 다 풀었고, 우리는 그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여름방학 숙제로 학교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학원도 다니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이 어려운 문제집 두 권을 다 풀었을 리가 없다며, 거짓말을 한다고 아이를 믿어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학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으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선뜻 믿기 어려우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했음에도 거짓말쟁이로 몰린 아이는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곁에서 지켜보던 저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그날 이후로 항상 자신감 넘치던 아이의 어깨가 조금은 움츠러든 모습을 보면서 어른의 무심한 오해와 단정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3. 아이가 하는 말의 배경을 헤아려주는 어른이 된다는 것

그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까요. 요즘 손주가 들려주는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말들을 들으면 대견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바심과 걱정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저희 손주는 한번 보고 들은 것을 스펀지처럼 오랫동안 기억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표현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꺼내놓는 아이입니다. 평소에는 어른들과도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지만, 책을 볼 때면 자신이 머릿속에 담아둔 문장과 인상 깊었던 장면을 꺼내어 이야기합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 뒤에 숨은 배경까지 헤아려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믿어주는 어른이 아이 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해야 합니다. 아이가 예상치 못한 말을 하더라도 섣불리 이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어디서 저런 멋진 말을 배웠을까?' 하고 그 배경을 먼저 더듬어보는 어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약 훗날 누군가가 손주의 말을 오해하거나 이상하게 바라보는 순간이 온다면, 이번만큼은 제가 가장 먼저 아이 편에 서서 힘있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아이가 하는 말은 거짓이나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평소 즐겨 읽던 아름다운 그림책에서 배운 이야기입니다." 하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아이가 세상을 탐색하며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른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한마디일지라도, 아이에게는 분명한 이유와 자기만의 맥락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도 손주가 건네는 자그마한 말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읽어주는 따뜻한 할머니가 되고자 다짐해 봅니다.


※ 본 포스팅은 유아 언어발달 관련 학술 자료(NAEYC 및 CDC 발달 지표)와 개인적인 육아 회고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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