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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주를 데리고 외출을 나가 처음 만나는 이웃이나 어르신을 마주치면, 아이는 어김없이 제 다리 뒤로 몸을 살짝 숨기며 "할머니, 부끄러워"하고 낮게 속삭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을 잡고 신나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이가, 누가 조금만 친근하게 말을 걸며 관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돌려버립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처음에는 "우리 손주가 낯을 가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심히 관찰해 보니 단순한 낯가림과는 결이 많이 달랐습니다.

 

낯선 사람을 보고 무서워서 엉엉 울거나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을 아끼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딴판인 아이가 된다는 점입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들려주고, 심지어 "할머니, 그때 내가 왜 그랬냐면 말이야~"

 

하면서 그때의 자기 마음까지 덧붙여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방금 전 낯선 사람 앞에서 숨어있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씩씩하고 표현이 풍부합니다.

 

식판과 애착 장난감 피규어 지퍼백을 앞에 두고 집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준비를 하는 손주의 모습


1. 부끄러움은 왜 낯선 사람 앞에서만 나타날까? (자의식적 감정)

아이가 왜 집 밖에서만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궁금하여 아동발달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순한 '낯가림'과는 학술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감정 반응이었습니다.

 

발달심리학자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의 '자의식적 감정(Self-conscious emotions)' 이론에 따르면, 부끄러움은 생후 15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는 고차원적인 감정입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 구분하여 인식하는 '자기인식(Self-awareness)' 능력이 발달하는데, 이 자의식이 형성되지 않으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자체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루이스 교수 연구팀은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촉매제를 바로 "타인의 집중된 시선과 관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가 자신이 타인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그 시선 자체가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구분 영유아 낯가림 (Stranger Anxiety) 부끄러움 (Shyness / Self-Consciousness)
발생 시기 생후 6~8개월경 시작 (애착 형성 시기) 생후 15~24개월 이후 (자기인식 형성 시기)
주요 원인 양육자와 낯선 이에 대한 생존적 불안 및 위협감 타인의 관심과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자각함
아이의 반응 울음을 터뜨리거나 공포감을 느끼고 강력히 거부함 말을 아끼고 시선을 피하며 보호자 뒤로 숨음
발달적 의미 보호자와의 애착관계가 정상 형성되었음을 의미 '나'를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의식의 성장을 의미

낯선 사람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고 질문을 던질 때, 아이는 그 집중된 관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 얼어붙게 됩니다.

 

반면 익숙하고 편안한 집에서는 가족들의 시선에 자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의 밝고 통통 튀는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시간을 주면 스스로 풀어지는 이유 (억제된 기질 연구)

손주를 관찰하면서 또 하나 발견한 긍정적인 신호는,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억지로 관계를 강요하지 않고 시간을 조금 주고 관찰하게 해주면 아이가 이내 편안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 다리 뒤에 숨어 말 한마디 못 하다가도, 몇 번 얼굴을 익히고 나면 어느새 스스로 다가가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발달심리학의 대가 제롬 케이건(Jerome Kagan) 교수의 기질 연구와 완벽히 일치합니다. 케이건 교수는 낯설고 새로운 환경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신중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의 특성을 '억제된 기질(Behavioral Inhibition)'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억제된 기질을 가진 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평생 고쳐지지 않는 결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극을 탐색할 만한 충분한 시간과 안정감이 주어지면 아이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여 점차 적극적이고 편안한 상태로 변화합니다.

 

즉, 부끄러움은 굳어진 성격이 아니라 아이가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거치는 자연스럽고 신중한 탐색 과정인 것입니다.


3. 억지로 인사시키거나 다그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

이러한 발달심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난 뒤부터는 손주가 낯선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더라도 굳이 "어른을 봤으면 빨리 인사해야지", "왜 집에서는 말을 잘하면서 밖에만 나오면 말을 못 하니?" 하고 다그치거나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가 스스로 안심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조력자 역할을 택했습니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할머니 옆에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해도 충분히 괜찮다고 다정하게 말해주고, 아이 마음에 다가갈 준비가 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줍니다.

"현실적으로 늘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쁜 일정이나 급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동해야 할 때 아이가 부끄러워한다면, '오늘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어른이 먼저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의 부끄러움을 고쳐야 할 단점으로 보고 조급해하는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아이의 내면에 '나'라는 정체성과 타인을 의식하는 자기인식이 훌륭하게 자리 잡았다는 기특한 신호임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부끄러움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 또래 친구들과의 최소한의 교류조차 지속적으로 거부하거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환경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극심한 공포나 스트레스 증상을 보인다면 전문 기관을 찾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도 낯선 얼굴 앞에서는 제 옷자락을 꼭 쥐고 뒤로 숨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식판을 앞에 두고 그때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손주를 바라봅니다.

 

아이의 작은 내면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나'라는 감각을 느끼며, 오늘 밤도 아이의 이야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봅니다.


※ 참고자료: Michael Lewis, The Self-Conscious Emotions (Encyclopedia on Early Childhood Development) / Jerome Kagan, Behavioral Inhibition in Children (Temperament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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